블랙리스트 시즌10 결말 해석, 10년짜리 미스터리는 왜 안 풀렸나

10년간 쫓기던 남자의 마지막 산책

블랙리스트를 시즌 10까지 다 본 사람이라면 아마 그 장면을 잊기 어려울 거예요. 안달루시아의 들판에서 황소와 마주선 레이몬드 레딩턴. 말 한마디 없이 미소만 짓고, 그리고 끝.

218에피소드, 10시즌 동안 어떤 추적도, 어떤 음모도, 어떤 배신도 뚫고 살아남았던 사람이 결국 황소한테 죽는다는 건 좀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그렇게 가야만 했나?"라는 질문은 당연한 거예요.

블랙리스트

선택지가 세 개 있었어요. 전부 나빴고요.

시리즈 마지막 두 에피소드에서 레딩턴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면 이래요. 의원 아서 허드슨이 태스크포스에 레딩턴 체포를 명령했고, 후임자 조던 닉슨은 필요하면 재판 없이 사살하겠다고까지 했어요. 뎀베를 구하기 위해 FBI 호송대에 돌진하면서 레딩턴은 자기 몸까지 크게 다친 상태였고요.

이 시점에서 레딩턴 앞에 놓인 길은 세 가지뿐이에요.

첫째, 체포되어 감옥에 가는 것. 그가 FBI에 넘긴 범죄자들로 가득한 교도소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어요. 레딩턴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 화이티 벌저가 교도소 이감 후 몇 시간 만에 살해당했거든요.
둘째, 레슬러에게 총을 꺼내 보여서 사살당하는 것. 자기 손으로 끝낼 수는 있지만, 레슬러에게 그 짐을 지우는 거예요. 리즈의 딸 아그네스의 할아버지(혹은 조부모)를 죽인 사람이라는 무게를요.
셋째, 계속 도망치는 것. 레딩턴이라면 가능하긴 해요. 근데 정체불명의 병이 재발한 상태에서 영원히 도망치는 건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죽음을 미루는 거예요.

황소는 네 번째 선택지였어요. 아무에게도 짐을 지우지 않고, 잡히지도 않고, 자기 발로 걸어가서 맞이한 죽음. 그게 레딩턴한테는 가장 '그다운' 끝이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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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놀레테의 두개골이 이 결말의 열쇠예요

시즌 10에서 레딩턴은 이슬레로라는 황소의 두개골을 갖고 있었어요. 이슬레로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투우사 마놀레테를 죽인 황소거든요. 레딩턴은 마놀레테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 "위험 없이 사는 것보다 목숨을 거는 게 더 쉬운 사람이었다."

마놀레테는 1947년 링 위에서 황소에게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어요. 흥미로운 건, 마놀레테의 사인이 황소의 뿔 자체가 아니라 혈액형이 맞지 않는 수혈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는 거예요.

블랙리스트 마지막 화에서 레딩턴은 뎀베의 목에 총상을 입힌 뒤 자기 피를 수혈해서 살려요. 의사가 "위험하다"고 경고했는데도요. 마놀레테가 부적합한 수혈로 죽었다는 설과 레딩턴이 뎀베에게 수혈하고 약해진 채 황소를 마주한 것. 이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너무 정교해요.

💡 파일럿 에피소드의 복선
시즌 1 첫 화에서 화학무기가 몸에 묶인 소녀 베스가 리즈에게 동물 팔찌를 주면서 이렇게 말해요. "황소가 찔러. 조심해." 218에피소드 전에 깔린 복선이 마지막 화에서 회수된 거예요.

레딩턴이 뉴욕 은신처에서 유일하게 챙겨간 물건이 이슬레로의 두개골이었고, 그걸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미우라 목장에 묻으러 간 거예요. 태스크포스의 시야 말리크 요원이 이걸 알아차리면서 레딩턴의 위치가 드러나게 됐고요.

제작진 사이에서도 결말은 합의가 아니었어요

이 결말의 배경에는 제작진 내부의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블랙리스트의 원작자 존 보켄캠프는 시즌 8이 끝난 뒤 시리즈를 떠났어요. 시즌 8 피날레에서 리즈가 퇴장하는 장면은 보켄캠프가 레딩턴의 정체를 '레다리나'(레딩턴 = 카타리나 로스토바)로 암시하는 방향이었다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에요.

이후 시리즈를 이끈 쇼러너 존 아이젠드래스는 TV라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내 뜻대로 된다면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될 겁니다. 만약 끝까지 모른다면, 누군가가 나를 막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막았어요
시리즈 피날레에서 레딩턴의 정체는 명시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어요. 쿠퍼가 레딩턴을 아그네스의 "조부모(grandparent)"라고 부른 것, 아그네스가 "엄마 같다"고 말한 것 정도가 간접적인 힌트로 남았을 뿐이에요.

제임스 스페이더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정확히 끝낼 수 있어서 기뻤다. 의도적이었고, 끝이 언제 올지 놀라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이걸 보면 황소라는 결말 자체는 꽤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보여요.

근데 정체 공개와 죽음의 방식은 별개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마놀레테 두개골이 시즌 10 초반부터 등장한 걸 보면 황소 결말은 처음부터 설계된 거지만, "레딩턴이 누구인가"라는 10년짜리 질문에 답을 줄지 말지는 마지막까지 줄다리기가 있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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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이 분노한 건 죽음이 아니라 침묵이에요

결말에 대한 반응은 크게 갈렸어요. IMDb에서 마지막 화 평점은 낮았고, 팬덤에서는 "TV 역사상 최악의 피날레 중 하나"라는 평가도 나왔어요.

근데 자세히 보면, 분노의 핵심은 "황소한테 죽은 것" 자체가 아니에요. 10시즌 동안 끌어온 "레딩턴은 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끝까지 답을 안 한 게 문제였던 거예요. 황소 장면 자체를 떼어놓고 보면 상징적으로는 꽤 잘 짜여있거든요.

좋은 결말이라는 쪽
잡히지 않은 채, 자기 조건으로 죽었다. 마놀레테 복선 회수가 정교하다. 뎀베의 추도 독백이 캐릭터를 완성했다.
나쁜 결말이라는 쪽
10년간의 미스터리가 미해결. 정체를 안 밝힌 건 용기가 아니라 회피. 218에피소드를 투자한 시청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 결말을 옹호하는 분석도 있어요. 황소가 레딩턴에게는 체포, 병사, 교도소 살해라는 세 가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모두 피하게 해준 '기적' 같은 존재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스페인 투우용 소는 암수 구분이 외관상 어려운데, 이것마저 레딩턴의 모호한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었고요.

정리하면 이래요
1️⃣ 레딩턴의 황소 죽음은 마놀레테 복선에서 이어진, 시즌 10 초반부터 설계된 결말이에요.
2️⃣ 체포·사살·병사 중 어떤 것도 '레딩턴답지' 않았기에, 자기 발로 걸어가 맞이한 죽음이 선택됐어요.
3️⃣ 팬들의 진짜 불만은 죽음의 방식보다 10년간의 정체 미스터리를 끝내 풀지 않은 데 있어요.

레슬러가 들판에서 레딩턴의 시신을 발견하고 무전을 치는 장면이 있어요. "찾았다(I've got him)." 10년간 쫓아다닌 사람을 마침내 찾은 거예요. 잡은 게 아니었죠. 레딩턴은 끝내 잡히지 않았어요. 죽어서도.

레슬러가 레딩턴의 피투성이 머리 위에 모자를 올려놓는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이 시리즈가 줄 수 있었던 가장 레딩턴다운 마침표예요. 답은 끝내 안 주면서, 떠난 자리에 모자 하나만 남기는 거. 그게 레이몬드 레딩턴이라는 캐릭터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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